어디선가 읽은 얘기인데 정상이던 사람이 시력을 완전히 잃으면
점차 형태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다고 합니다.
특이한 것은 1, 2, 3 같은 아라비아 숫자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잊어버리더라도
손으로 아라비아 숫자를 허공에 쓸 수는 있다고 합니다.
특별한 어느 한 사람의 경우인지 일반적인 것인지는 모르겠어요.
다만 우리가 아라비아 숫자처럼 항상 손으로 쓰며 익힌 것들은
뇌가 그 모습을 기억하지는 못하더라도
손으로 쓸 때의 그 움직임은 기억한다는 겁니다.
아마 그래서 영어 단어를 외울 때 손으로 쓰면서 외우라고 하고
수학 공부도 쓰면서 하라고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몸이 기억해서 거의 무의식적으로 써질 수 있도록 훈련을 하는 거죠.
그러면 그 옛날 한석봉 어머니처럼 깜깜한 곳에서도
능숙하게 떡을 썰게 되는가 봅니다.
우리의 기억은 매우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편입니다.
제가 김아중 얼굴을 사진으로 그렇게 많이 봤지만
사실 눈을 감으면 정확하게 떠오르지 않아요.
보기만 했으니 외워지질 않는 거죠.
그건 아마 저뿐만은 아닐 겁니다.
전체적인 인상은 분명히 기억한다고 자신하지만
얼굴의 각 부분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정확히 기억해낼 수가 없습니다.
사진을 안 보고 그리라고 하면 그릴 수가 없죠.
그건 그림 솜씨가 없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정확한 기억이 없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보고 그린다고 해도 나아질 건 없어요...
소질의 문제이기도 한 거거든요.
어쨌든 솔직히 저 자신의 얼굴도 사진이나 거울을 안 보며 그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김아중 얼굴을 안 보고 그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려면 눈, 코, 입의 정확한 모양새며 삼차원에서의
상대적 위치에 대한 정확한 인지와 재현 능력이 필요하겠죠.
무지막지하게 연습해야 할 겁니다.
영어 단어 나부랭이를 외우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겠죠.
김아중 사진 한 장을 들고 어디 계룡산같이 깊은 산 속에라도 들어가서
낮이고 밤이고 데생 연습을 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겨울이 서너 번 지나고 눈 속에 다시 매화 향기가 희미하게 묻어날 즈음엔
결국 깜깜한 데서도 고요히 앉아 김아중을 떡 썰듯 쓱쓱 그려내게 되겠죠.
풍덩 빠져서 수영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바로 그 눈동자를 말이죠.
그러면 하산... ...
그 길로 머리도 안 감은 채 김아중을 찾아가는 겁니다.
날카로운 제도 샤프 한 자루를 가슴에 품고.
아... ... ... ...
... ...김아중 집을 모르네... ... 젠...
... ... 안다고 칩시다, 안다고 쳐요.
제가 아무리 허접스러운 팬이라도 그때까지 그깟 거 하나 못 알아내겠어요.
정 안 되면 그 무슨 메르신가 뭐시기 앞에서 진을 치는 거죠.
하여간
띵 똥, 띵 똥.
누구세요?
예, 제가 계룡산에서 수년간 도를... 아니, 그, 그림을 막 닦다가...
아 저희는 도 안 믿어요. 다른 데 가보세요.
아니 그림이라니까요.
아~ 그런 거 안 사요. 다른 데 가보세요.
딸깍.
... ... ... ...
제가 그림 연습을 해서 뭐하겠어요.
늘어날 실력도 없고, 는다고 한들 쓸 데도 없고요.
그냥 모두 기억하고 싶은 거에요.
김아중의 얼굴 전부를 세세하게 기억하고 싶어요.
그려보면 손에 익어서 모두 기억이 날 거 같은 거죠.
그냥은 아무리 봐도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요.
돌아서면 잘 모르겠어요.
머리가... 머리가... 그냥 돌덩이에요.
마음속에서 그 서늘한 눈동자를 또렷이 기억해낼 수 있다면
웃을 때 살짝 올라가는 그 입매의 정확한 각도를 자로 잰 듯 떠올릴 수 있다면
온종일 미친놈처럼 실실거리며 행복해질 거 같아요.

(사진 출처: 영화 '캐치 미'(2013.12.18 개봉)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