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백산 중턱 어느 작은 암자에서 블로그를 만들고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나는 몇 주일씩이나 사람이라고는 통 그림자도 구경 못 하고, 다만 황구
한 마리와 잔뜩 쌓여있는 사진들을 끌어안고 홀로 지내야 했습니다.
이따금 태백산의 약초꾼이 지나가는 일도 있었고, 정선 아우라지에서
숯 굽는 사람의 거무데데한 얼굴이 눈에 띄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은 고독한 나머지 말이 없었고 이야기하는 흥미조차
잃고 있었기 때문에, 산 아랫마을이나 거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따위는 아무것도
모르는 소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보름마다 2주일분의 식량을 운반해 오는 아랫마을 숙자네 슈퍼의
낡은 봉고차 소리가 들릴 때라든지, 배달하는 청년의 명랑한 얼굴이나
슈퍼집 아주머니의 녹색 새마을 모자가 고개 위에 점점 나타날 때에는 나는
정말 견딜 수 없을 만큼 기뻤습니다.
그때마다, 나는 이장댁 큰딸이 바람이 났다든지, 누가 결혼을 했다든지,
그사이 산 밑에서 일어난 소식을 연해 캐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관심이 쏠리는 것은 숙자네 슈퍼집 둘째 딸, 이 근처 백 리 안에서
가장 예쁜 아중 아가씨가 어떻게 지내는지를 아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별로 흥미를 갖고 있지 않은 체하면서, 동네 청년들이 아가씨 주위를
얼쩡거리지는 않는지, 여전히 아가씨는 배우가 되고 싶어 하는지 등을 물었습니다.
만약 산에서 블로그질이나 하는 하찮은 나에게 있어서 그런 일들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나는 20세이며, 저 아중 양이야말로 내가 본 여성 중에 가장 아름다웠노라고.
그러던 어느 일요일, 기다리던 2주일분의 식량이 좀처럼 도착하지 않았는데,
아침부터 심한 소나기가 쏟아졌기 때문에 길이 나빠서 봉고차가 떠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드디어 세 시쯤이 되어 겨우 하늘이 말끔히 개고 산이 물기와 햇빛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을 때, 나뭇잎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와 물이 불어
시냇물이 넘쳐 흐르는 소리에 섞여 털털거리는 봉고차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런데 봉고를 타고 온 것은 배달하는 청년도, 슈퍼집 아주머니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누구였겠어요? 바로 아가씨였던 것입니다!
식료품 상자들 사이에 몸을 곧게 세우고 산의 대기와 소나기 후의 맑은 바람으로
뺨이 붉은 장밋빛으로 물든 바로 그 아가씨였습니다.
아주머니는 감기몸살이 났고 배달 청년은 휴가라고 예쁜 아중 양은 봉고에서 내리며
내게 일러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이렇게 늦은 것은 오는 도중에 길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꽃 리본과 화려한 치마와 레이스 등으로 단장한
아가씨의 모습을 보면, 숲 속에서 길을 찾고 있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동네 콜라텍이라도 다녀온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 귀여운 아중 아가씨! 나는 언제까지나 아가씨를 싫증 내지 않고 보고 있었습니다.
정말 이렇게 가까이에서 아가씨를 본 일은 이제까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겨울에 봉고가 못 올라오게 되면 나는 마을로 내려가 슈퍼에 들르곤 했는데,
그때 아가씨가 카운터를 보는 때가 있었습니다. 언제나 잘 차려입은 아가씨는
손님들에게는 좀처럼 말을 하지 않고 도도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 아가씨가
바로 내 눈앞에 와 있는 것입니다. 오로지 나만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니 내 마음이 타오르지 않을 수는 없었겠지요.
아가씨는 상자에서 식료품을 꺼내면서 신기한 듯 사방을 둘러보다가
아름다운 나들이 치마가 더럽혀지지 않도록 살짝 들어 올리고 내가 기거하는
암자 안으로 불쑥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자는 자리며 책상, 책꽂이에 놓여있는 한정판 건담 등을
보며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살고 있군요. 항상 혼자서! 무엇을 하고 있어요?
어떤 일을 생각하고 있어요?"
나는 "아가씨 당신의 생각을..." 하고 대답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대답해도 거짓말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아주 당황해서
분명하게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아가씨도 눈치를 챈 것 같았지만
짓궂은 아가씨는 농담을 해서 나를 한층 더 곤란하게 만들고는
재미있어했습니다.
"그래 상냥한 여자 친구는 가끔 당신을 만나러 올라오나요?
그럴 때는 정말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보이겠어요."
그런데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뒤로 젖히고 귀엽게 웃는 것이라든지,
분주하게 왔다가 숨 돌릴 틈도 없이 가버리고 마는 그 서운한 여운이 아가씨야말로
내게는 선녀 같았습니다.
"그럼 안녕."
"안녕히 가셔요, 아가씨."
이리하여 아가씨는 빈 상자를 가지고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가씨가 작은 길을 따라 자취를 감춘 뒤에도 차바퀴에 채어 구르는
조약돌 소리들이 내 심장 위에 떨어져 내렸습니다.
나는 그 돌들이 구르는 소리를 오래도록 가만히 듣고 있었습니다.
저녁때가 다 되어 골짜기가 푸르스름하게 물들기 시작하고 컴퓨터의 윙윙거리는 소리만
나지막이 들릴 무렵이었습니다. 고갯길에서 누군가가 나를 부르고 있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곧, 아가씨의 모습이 눈에 띄었습니다. 생글생글 웃던 모습은 간데없고,
흠뻑 물에 젖어 추위와 공포로 바들바들 떨고 있었습니다. 산기슭에 이르러
물이 분 계곡을 무리하게 건너려고 하다가 물에 빠질 뻔했던 모양입니다.
곤란하게도 이렇게 밤이 되어 혼자 집에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산 위에서 밤을 새워야 하며, 더구나 가족들이 근심할 것이라는 생각에 아가씨는
안절부절못했지만, 나로서는 힘자라는 데까지 아가씨가 안심하도록
위로해 주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아가씨, 칠월은 밤이 짧습니다... 조금만 참으시면 됩니다."
아, 나는 무엇을 참으라고 했던 것일까요? 이렇게 달래놓고는 아가씨의 발과
계곡의 물에 흠뻑 젖은 옷을 말리기 위해 급히 불을 피우고 이어 라면을 끓여
아가씨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그러나 가엾게도 아가씨는 불을 쬐려고도
먹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가씨의 눈에 굵은 눈물방울이 맺히는 것을 보자
나도 울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아주 밤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아득한 산꼭대기에 겨우 싸라기만큼이나
햇볕이 남아있어, 서쪽 하늘에 증기처럼 한 줄기 빛이 비껴 있을 뿐이었습니다.
나는 아가씨가 집 안에 들어가서 쉬기를 바랐습니다.
아껴두었던 새 시트를 깔고 아가씨에게 편히 주무시라고 인사를 한 후
나는 밖으로 나와 문 앞에 앉았습니다. 내가 방 밖으로 나올 때 무엇인가 서운한
듯하던 아가씨의 눈빛이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마음의 불길에 피가 타오를 듯했지만, 불순한 생각은 티끌만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방 한구석에서, 아가씨가 나의 보호 아래 마음 편히 자고
있다는 생각에 오직 자랑스러운 마음만 차오를 뿐이었습니다... ...
이제까지 하늘이 이렇게 끝없고 별이 이렇게 빛나 보인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방문이 열리고 아름다운 아중 양이 나타났습니다.
아가씨는 잠을 잘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풀벌레 소리며 산이 만들어내는 낯선 소리들에 아가씨는 차라리 모닥불 옆으로
나오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겠지요.
나는 내 가디건으로 아가씨의 어깨를 덮어 주고 불을 많이 지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가까이 다가앉아 언제까지나 말없이 앉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불빛에 물든 아가씨의 얼굴은 신비로운 아름다움이 가득했지요.
만약 당신이 노천에서 밤을 지낸 일이 있다면, 사람이 잠들고 있는 시간에는
신비스러운 세계가 고독과 고요 속에서 눈을 뜬다는 사실을 아실 것입니다. 그때
샘물은 한층 더 맑게 갠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못에는 작은 불꽃이 반짝입니다.
한 번은 아름다운 유성 하나가 우리 머리 위를 지나 흘러갔습니다.
"저건 무엇이죠?"
하고 아중 양이 낮은 소리로 물었습니다.
"덕후의 길로 들어가는 영혼입니다. 아가씨."
하면서 나는 성호를 그었습니다. 아가씨도 성호를 그었습니다.
그리고는 잠시 뚫어지게 하늘을 쳐다보고 있더니 불쑥 이렇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정말인가요? 당신들 블로그 하는 사람들은 히키코모리라는 것이요?"
"그럴 리가요. 아가씨. 하지만 이렇게 늘 별 가까이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평지에 있는 사람들보다는 덕후의 세계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는 것이죠."
아가씨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마치 귀여운 숲의 요정처럼 내 가디건에 싸여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저렇게 많을까요. 어쩌면 저렇게도 예쁠까!"
'그래도 아가씨한테 비할 수는 없지요.'라고 말을 할 뻔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별을 나는 본 일이 없어요.....
당신은 저 별들의 이름을 다 알고 있어요?"
"알고 말고요, 아가씨..... 자, 이것 보셔요! 우리 바로 위에 있는 것이
'성 애쉬아의 길', 바로 은하수입니다. 저것은 태백산에서 곧장 논현동까지
이어지지요. 지방의 덕후들이 서울로 조공을 갈 때 길을 잃지 않도록
인스타의 '성 애쉬아'가 뿌려놓은 떡밥 가루랍니다.
그리고 좀 더 멀리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것은 큰덕자리입니다.
그 앞을 가는 세 개의 별은 '세 마리의 오덕'이고,
세 번째 오덕 옆에 있는 저 아주 작은 꼬마별이 '총대'입니다. 불쌍한 별이지요.
그 언저리에 온통 빗발처럼 내리 떨어지는 별들이 보이죠?
그건 하느님께서 당신 나라에 들이고 싶지 않은 스토커들의 영혼이랍니다.
저 조금 밑에 있는 것이 '십덕', 혹은 별명으로 '얼빠의 임금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블로거에게는 행동 지침 구실을 해주는 별이지요.
그 별을 쳐다보기만 해도, 나는 지금 떡밥을 물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안답니다.
그렇지만, 아가씨, 온갖 별 중에도 제일 빛나는 별은요,
그건 뭐니뭐니해도 역시 우리들의 별이죠. 저 '광덕의 별' 말입니다.
참신한 아이디어가 떠오른 새벽녘이나, 다 작성한 포스트를 에러로 날려 먹은
허탈한 저녁에도 우리 블로거들을 비춰주는 별이랍니다. 우리는 이 별을
'마니아'라고도 부르지요. 마니아별은 저기 하늘 한복판에서 빛나고 있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별 '쎈터롭 에이샤'의 뒤를 쫓아가서,
칠 년마다 결혼을 한답니다."
"어머나! 그럼 별들도 결혼이라는 걸 하나요?".
"그럼요, 아가씨".
이어서 그 결혼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를 이야기해 주려고 했을 때,
나는 무엇인가 상쾌하고 부드러운 것이 살며시 내 어깨를 누르는 감촉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아가씨가 졸음에 겨워 무거운 머리를, 리본과 레이스와 물결치는 머리카락을
앙증스럽게 비벼대며, 가만히 기대온 것이었습니다.
가슴이 설렘을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내 마음은, 오직 아름다운 것만을 생각하게 해주는
그 맑은 밤하늘의 비호를 받아, 어디까지나 성스럽고 순결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총총한 별들이 마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덕후들처럼 고분고분하게
고요히 그들의 운행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따금 이런 생각이 내 머리를 스치곤 했습니다.
- 저 숱한 별 중에 가장 아름답고 가장 빛나는 별 하나가 그만 길을 잃고
내 어깨에 내려앉아 고이 잠들어 있노라고.
https://www.youtube.com/watch?v=S1ruI2tLPVg
별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그런 밤을 가끔 상상해봅니다.
저 별은 내 꺼, 저어~~기 저건 니꺼. 그런 수작을 부려본 지도 참 오래되었습니다.
어깨에 내려왔던 별은 아쉬움만 가득 남긴 채 다시 하늘로 돌아갔겠지요.
인연이란...
** 첨삭한 '알퐁스 도데'의 '별' 번역문 출처
1. http://zetawiki.com/wiki/%EC%95%8C%ED%90%81%EC%8A%A4_%EB%8F%84%EB%8D%B0_-_%EB%B3%84
2. http://cafe.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zklg&fldid=Fobd&datanum=173
(사진 출처: 코스모폴리탄: http://www.cosmopolitan.co.kr/article/RetArticleView.asp?strArtclCd=A000005724&strFCateCd=AAA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