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23일 일요일

김아중 그리고 줄 위의 인생



일이 계획대로 잘 안 될 때를 대비해서 차선책을 준비해놓는 경우가 있죠.

저는 거창한 플랜을 세워본 적도 거의 없고

차선책이라는 건 더더욱 준비해본 적이 거의 없지만

일상적인 소소한 플랜들 변경은 수시로 합니다.


예를 들어 산에 올라가다가 힘들면 중간에 관둔다든지,

거실 청소를 하겠다고 청소기를 보란 듯 돌리다가 주방은 빼기도 하고,

눈치가 보이면 안방은 한 번 돌려주기도 하고 뭐 그런 거죠.


... 계획이란 게 없어...


처음과 다른 플랜들이 있으면,

그리고 변경된 플랜 B, C 등을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으면

스트레스도 덜 받고 몸과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죠.


어렸을 때의 영화 감상이 꽤 만족스러웠던 것도

차선책들에 관한 유연한 마음가짐 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드리 헵번이 아니면 마릴린 먼로를 보면 됐고,

마릴린이 아니면 까뜨린느 드뇌브를 봐도 좋았기 때문에

TV든 극장이든 영화들이 전혀 실망스럽지 않았어요.


... 대단한 차선책에 대단한 유연함...


지금은 영화에 관한 한 매우 경직된 삶을 살고 있죠.

'반드시'라고 할 수밖에 없는 지켜야 할 플랜 A가 있습니다.

'니들은 아무 영화나 보냐? 난 김아중 영화만 본다.

그게 얼마나 짠내 나는 건지 보여줄게.'

뭐 그런, 나름 비장한 누아르풍의 플랜 A입니다.


이쪽으로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다른 플랜이 없어요.

다른 건 아내한테 다 밀려도 이것만은 변경 불가죠.

이런 게 삶을 상당히 팍팍하게 합니다.


어쩌면 여기엔 아내의 오해를 막아야 한다는

무의식적인 절박함이 작용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 이 남자, 아무 배우나 다 보는구나.'라고 아내가 오해라도 하게 되면

막 아무 영화나 같이 보자고 개 끌듯 끌고 다닐 거거든요.

저한테는 플랜 C나 D도 안 될 영화들 말이에요.

그러면 그동안 김아중을 향해 지켜온

저의 영화적 순수성이 돌이킬 수 없이 훼손되는 거죠.

제게는 그나마 유일하게 남은 순수성인데...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순수하다는 건 외줄 위를 걷는 것처럼 위태로워요.

여차하면 나락으로 떨어져 오염되죠.

코트를 펄럭이며 죽기 살기로 총을 쏴대는 홍콩 영화의

비장함 같은 것도 가끔 느껴져요.

어쩌다 줄이 한번 흔들리면 등줄기로 식은땀이 촤악...


아니 이게 뭐 그렇게까지 하며 살 일인지,

이런 일에 순수성이라는 게 맞는 말인지 의아할지 모르지만,

순수가 별건가요.

팬으로서의 신념을 지키면 순수한 거지.


...뭘 또 신념씩이나...



그리고 결국 덕질이란 이런 거죠.

자신을 가두는 틀과 세상의 모든 편견을 깨며 혼자 가는 거...


세상 비장... ...


7월엔 김아중이 진행하는 TV 프로도 방영된다고 하고,

올해엔 드디어 김아중 영화가 개봉된다고 하긴 했는데 말이죠.

저의 대쪽 같은 순수성을 또다시 시험하게 되겠지요.

물론 저는 예전처럼 능히 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젠 영화가 개봉되면 아내가 그냥 가서 보라고 할 것만 같아요.

나이 드니까 상호 이해의 폭도 넓어지고 무엇보다 서로 측은하거든요.

모처럼 좋아하는 배우 나왔다면서 눈치를 보면 불쌍할 거 아니에요.

살면 이제 얼마나 산다고...

나 같으면 불쌍할 것 같아...


하여간,

그 나이에 그러고 싶어? 부류의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질문 아닌 질문이라도 받게 되면

응! 한 마디 던진 다음에 어이없어할 때 냅다 뛰어야죠.

극장으로...

... 그날만 사는 거니까.


줄 위의 인생.




(사진 출처: 다음 카페 ㅌㅡ라이앵글: http://cafe.daum.net/KAJfamily/eOar/71)



2019년 6월 18일 화요일

김아중 그리고 나의 주문



'샤잠'이라는 주문을 외치면 번개가 치면서 주인공 소년이

순식간에 수퍼히어로로 변하는 영화를 봤어요.

복장은 물론 외모까지 한번에 바뀌니까 평소 신분을 숨겨야 하고

튀는 옷을 입어야만 기운이 나는 히어로들한테는

참 적절하고 신선한 설정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위급할 때 변장하기 위해 어느 구석으로 달려가

몰래 옷을 갈아입거나 가면을 써야 할 일도 없고

마법의 옷이니까 빨래나 보관도 문제없고,

단 두 마디로 히어로 관련 찌질한 난제들이 한번에 해결된 겁니다.


'샤잠!'


... 근데 애초에 대개의 히어로들은 왜 신분을 감추려는 걸까요?

옷은 왜 또 죽어라 쫄쫄이만 입고...


가끔 기분이 가라앉을 때가 있어요.

알 수 없는 조바심이 나기도 하고요.

그럴 때 좋아하는 것들을 떠올리면 괜찮아지죠.

좋아하는 거라고 해봐야 뭐 늘 김아중이지만 말이죠.


하지만 김아중을 떠올리면 선명한 한 가지 모습이 아니라

이런저런 모습들이 흐릿하게 겹쳐 떠올라요.

그래서 그런지 가라앉은 기분이 단번에 사라지기보다는

뭔가 뭉그적거리며 슬금슬금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죠.

차가운 맥주를 단숨에 들이켤 때 느껴지는 '쨍'함이 부족해요.


근데 이제 영화에서 영감을 받아 효과적인 방법을 알아냈다는 겁니다.

큐사인이나 수업 시작종처럼 명확한 신호를 머리로 보내는 거예요.

저한텐 일종의 주문이죠.


'아즁!'


비록 내가 변신하진 않지만, 머릿속 어지러운 생각들이 '펑!' 사라져요.

막연한 이미지보다는 뚜렷한 음절이 사고의 흐름을 단번에 바꾸는 거죠.


'아즁!'


'아중!' 보다는 어쩐지 '아즁!'이에요.

'아중'은 함부로 부르기엔 너무 귀한 이름이니까.


'아즁!'


슈우~웅 하는 느낌으로 빠져드는 겁니다.

소리 낼 필요는 없죠.

그냥 단어를 떠올리거나, 정 아쉬우면 입을 살짝 움직이는 거예요.

이름 자체에 강력한 힘이 있어요.


'아즁!'

살아온 날들은 왜 그 모양인지,


'아즁!'

살아갈 날들은 왜 달라지지 않을 것 같은지,


'아즁!'

자괴감이, 불안감이 순식간에 없어져요.


'아즁!'


이루지 못한 꿈들이 많은 것도

더는 이루고 싶은 꿈이 없는 것도 다 잊을 수 있어요.


'아즁!'

.

'아즁!'

.

'아중!'

... ...

... 주문이 잘 안 들으면 들을 때까지...


.

.

.

누구나 때로는 주문을 외우며 사는 거겠죠.

주문을 외우지 않아도 괜찮으면 좋겠어요.



(사진 출처: KBS 2009년 4, 5, 6월 수목 드라마 '그저 바라보다가' 13회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