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6일 화요일

아내도 변하지 않는다.


아내는 나 없는 6개월 동안 심심해서 집안 정리나 한다고 했었다.

돌아와 보니 자잘한 물건들을 이리저리 옮겨놓아 곤란해진 것들이 있다.

아내에겐 길가의 돌멩이보다 못한 것들이었겠지만,

내게는 가끔이라도 꼭 필요했던 것들이

어디로 갔는지 낡은 잡동사니 더미 속으로 파묻혀버린 거다.


다행히 특별히 숨겼다고 할 수는 없어도

매우 눈에 띄지 않을 장소에 있던 김아중 DVD들은

아무 건드린 흔적없이 제자리에 고이 놓여있어서

혼자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집은 말끔해졌지만 내가 손을 봐야 하는 것들도 있었다.

나 없어도 집은 대체로 멀쩡히 잘 돌아가지만

그래도 나의 손이 필요한 부분이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일견 뿌듯하기도 했는데


한편으로는

너무 잘 정돈되어 있으면 내가 머쓱해 할까 봐,

그러니까 아직은 내게도 쓸모있는 구석이

어딘가 남아있다는 걸 인식시켜주기 위해서

아내가 나를 위한 작은 배려로 남겨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했다.


꿈보다 해몽이 좋은...


잘 끼우기만 하면 되는 세탁기 세제 통 손잡이,

물이 조금씩 새는 세면기 수도꼭지,

작동이 시원치 않은 변기 밸브 등

모두 대단한 고장은 아니지만 약간은 불편한

그런 자잘한 삐걱거림 몇 가지를 손보고 나니

생활은 어느덧 6개월 전과 거의 같아진 듯했다.


'펀치' 방영할 시간이 다가옴에 따라

닭고기 삶는 냄새를 맡은 강아지처럼

내가 속으로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아내는 놀랍게도 빙긋이 웃으며 다가와

'당신, 김아중 나오는 거 그거, 뭐지? 그거 봐야지.' 하며 내 옆에 앉았었다.


채널 돌리다가 내가 아무 드라마의 한 자락이라도 잠시 보고 있으면

'그거, 걔 나오는 거 그거 재방송이야?' 하고 어련하겠냐는 듯

하지만 약간의 의심이 담긴 목소리로 물어보는 것도 여전했고,


갑작스러운 물음에 놀라긴 했지만, 한껏 호기롭게 '아~ 니~' 하며

떳떳한 상황을 잠시 즐기는 나 자신도 여전했다.


아내에게 나는 여전히 김아중을 좋아하는 주책없는 사람이었고

그 사실은 아무래도 우리 집 강아지가

말을 하는 날이 온다고 해도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아무 낌새도 내비치지 않은 6개월이었는데...

아내는 어째서 안 잊어버리는 건지...


이왕 이렇게 된 마당이라면 좀 더 진도를 나가도 되겠다는 생각에

'다시는 오지 못할 이 세상을 건너가'는 한 남자의 '핏빛' 심경으로

폰 벨 소리를 'Run The World'로 바꿀까도 했는데

급히 먹는 밥은 체할 수밖에 없다는 금언이 떠올라

'나의 절망에 빛이 되어준' 'Show Me Your Heart'로 일단 바꿔놓았다.


모든 건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갔다.

6개월 동안의 이국 생활은

마치 동네 산책이라도 다녀온 것처럼 잠깐으로 느껴지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차츰 흐릿해진다.


나는 여전히 김아중을 꿈꾸며 이렇게 블로그를 하고

아내는 여전히 모든 걸 아는 듯 모르는 듯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의 미소를 지으며 모호한 표정이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진 출처: 2014년 12월 15일 ~ 현재 방영 중, SBS 월화 드라마 '펀치' 1회
                dcinside 김아중 갤러리 Vivien 캡처: http://a-vivien.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