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15일 금요일

김아중 그리고 가방


사고 싶은 사진기 가방이 있었어요.

아니 그냥 가방인데 사진기 넣어 다니면 딱 좋게 생긴 메신저 가방이었죠.

그 가방만 있다면 매일 사진 찍으러 나갈 수 있을 거 같은 기분이 드는 거예요.

거기에 카메라를 넣어 다니면 세상을 놀라게 할 작품이 자동으로 찍힐 거 같고 막...


할 일 없이 생각하는 거지만 사진의 완성은 가방이죠.

가방이 있어야 사진 찍을 때 자세가 나오는 거거든요.

흘러내리는 앞머리 돌려 넘기듯 가방도 뒤로 휙 넘기며 잽싸게 셔터를 눌러대야

'아, 저놈 좀 찍나 보네.' ...


하여간 한 1년 전쯤 우연히 발견해서 가끔 눈여겨보던 가방이

얼마 전 세일을 하더라고요.

근데 보나 마나 1년에 한두 번 들고 나갈 둥 말 둥 한 가방을 산다는 건

이성적인 소비가 아니었죠.

사진의 완성이니 뭐니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아니었어요.


지금까지 '저놈만 있으면' 하는 생각으로 산 가방이 벌써 몇 개 있거든요.

실제로 어쩌다 그런 가방들에 카메라를 넣어 다니면 막... 무거워요...


그 중엔 아내가 아직 모르는 가방도 있죠.

몰래 사놓고 알아볼까 봐 한 번도 들고 나갈 수 없었던 겁니다.

아내가 내 살림엔 무심한 듯해도 새로 산 건 또 귀신같이 알죠.


'어? 그거 뭐야? 처음 보는 거네?'

이런 식의 대화가 시작되면 이미 끝난 거예요.

어떻게든 피해야죠.


그 가방이 진짜 마지막 사진의 완성인 줄 알았었는데...


근데 33% 세일 하던 게 며칠 지나 다시 보니 51% 세일을 하는 거예요.

51%... 무려...

흔히 볼 수 없는 숫자죠.

모든 이성적 방어막을 무너뜨리는 숫자예요.

.

.

질렀어요.

이런 거 계속 고민하고 있으면 건강에 해로우니까요.


제 취미는 사진이 아니라 사진기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근데 인제 보니 사진기도 아니고 가방이었...

뭔가 한참 비딱한 길로 들어섰어...


예전엔 배우가 좋으면 그 배우의 출연작들을 챙겨봤어요.

가수가 좋으면 그 가수의 노래를 들었고요.

그거면 충분했죠.

그들이 누구와 결혼했는지, 광고는 뭘 찍었는지, 밥은 잘 먹는지, 등등

작품을 떠난 개인사가 궁금했던 적이 없어요.

어쩌다 뭔가 알게 되면 음, 그렇구나. 했지요.


근데 김아중에 이르러 완전히 달라졌어요.

출연작도 좋지만, 김아중의 A에서 Z까지 모오~든 게 궁금... 한 건 아니라도

꽤, 아주 많은 것을 알고 싶죠.

그래서 광고도 보고 인터넷 검색도 하지만,

가끔은 그런 모든 것들이 뭔가 본질적인 것에서

한참 벗어나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의 카메라 가방처럼.


제가 만일 사진으로 밥을 먹고 살 수 있다면 아마 사진을 열심히 찍었겠죠.

근데 찍어보니 대충 알겠더라고요.

제가 사진에 재능이 없다는 걸요.

어쩌면 그걸 깨달은 순간 저는 사진보다 카메라에,

그리고 한 걸음 더 쓸데없이 나아가 가방에 관심이 생겼는지도 모릅니다.

사진으로 채워지지 않는 것을 다른 부수적인 것들로 메꾸는 거죠.

어떻게든 사진 언저리를 맴돌며 소비를 합리화하는 겁니다.


제가 영화 평론이나 제작 관련 일을 한다면

아마 김아중 출연작만 열심히 봤겠죠.

김아중의 연기력에만 관심이 있었을 거예요.

밥 먹어야 하니까.

물론 저는 김아중이 좋지만, 작품 평을 하거나 연기를 논하는 재능도 없지요.


그래서 이런 게 아닐까 싶어요.

영화나 연기는 모르지만 배우는 알기 쉬우니까.

김아중 인스타도 보고 트위터도 보고 사진도 모으고.

어떻게든 김아중 주위를 맴돌다 보면

'아, 이 구역 미친 놈은 저 할배네.' ...


그럼 예전에 좋아하던 배우들의 개인사엔 왜 관심이 없었을까? ...

그거슨 미스테리...


사진 가방에 꽂히는 사람들이 많은 건 아니겠지만 아예 없지는 않을 거예요.

이 나이 먹도록 여배우 좋아하는 사람 역시 많진 않아도 있기야 하겠죠.

그래서 내가 한참 엉뚱한 길에 올라 서 있다는 생각은 들지만

바꿀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취향은 살다 보면 자연히 변하기도 하니까

지금은 상황을 즐기는 게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 자연히 바뀌기는 개뿔...


가방을 보면 가방과 함께할 수 있는 사진 여행들이 상상되고

김아중 소식을 접하면 김아중이 지인이라도 된 듯한 느낌이 들죠.

둘 다 내가 쉽게 하지 못하거나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제가 가방이나 김아중을 좋아하고 소비하는 방식이

완전히 같은 건 아니지만 유사한 면이 있어요.


걸리면 둘 다 주금... 가방은 좀 낫겠지만...


가방에 오래된 필름 카메라를 넣고 낯선 곳으로 혼자 떠나보고 싶어요.

거리를 거닐며 조용히 셔터를 누르고

어느 작은 카페에 앉아 차도 마시며 온갖 폼을 다 잡아보는 거죠.

하지만

현실은 강아지 식사 당번... 배 나온 할배...


반값 세일 가방이 주던 환상이 어느새 시들고 있어요.

배에 착 감겨야 할 가방은 허리에서 튕길 뿐이죠.

가방으로 배를 가린다는 건 머릿속에서나 가능한 거예요.


물건 소유에서 오는 만족감은 아쉽게도 오래 가지 않죠.

그래서 또다시 슬금슬금 고민이 시작됩니다.

이젠 숨길 곳도 없는데.





(사진 출처: ZWC 오투 마스크 http://www.zw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