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28일 일요일

김아중 그리고 목련


어렸을 때 시골 외가 뒷산에서 옻이 올라 한참을 고생했던 적이 있다.

옻나무가 뭔지 모르고 산을 돌아다니다 그렇게 되었던 거라서

그 이후로는 혹시 또? 하는 마음에

산에 가면 나무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기도 한다.

옻 때문에 고생했던 일로 작은 정신적 외상을 입은 건가 싶기도 하다.


그 일 이후 옻나무만큼은 확실히 알아볼 수 있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 그렇게 자신이 있는 건 아니다.


대나무나 소나무처럼 아주 특색이 있거나 흔한 것이 아니면

어쩐 일인지 나무의 특징들은 기억에 남지를 않는다.

여러 방면에서 별 소질을 보인 적이 없었듯이

나무를 알아보는 소질도 역시 대단치 않다.


예를 들어 목련이나 개나리 같은 꽃나무도

꽃이 진 후 다른 나무들과 섞여 있으면 알아보질 못한다.


내 능력이 그저 그만큼이라 생각하지만

옻처럼 위험한 나무를 아직도 확실히 알지 못하는 것뿐 아니라

일반적인 다른 나무들도 잘 모른다는 게 난 좀 아쉽다.


내가 만일 꽃이 진 목련 나무를 알아볼 수 있다면

요즘처럼 초록 잎만 무성한 때라도

그 나무 근처에서는 하얀 목련을 상상할 수 있을 거다.

그건 나름 근사한 일이다.


화사하지만 한편 고즈넉한 내년 봄을 기대할 수도 있고 

목련이 피어있던 옛집마당이 생각날 수도 있고

목련이 떨어진 교정을 걸어가던 참했던 그 여학생이 생각날지도 모른다.


목련 나무 하나를 구별하여 알게 되면

그 주변 전체가 새로운 풍경으로 변할 것만 같다.


그러면 심심하기 짝이 없는 동네 산책길일지라도 

어딘가 비밀을 간직한 나만의 길이 될지도 모른다.


목련이 있는 길.

내 이야기가 들리는 길을 운치 있게 강아지와 매일 걷는 거다...


무언가를 알아볼 수 있고 그 이름을 구별하여 기억한다는 건

우리의 생존이나 일상에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줄 것이 틀림없다.


말이 난 김에 얘기하자면

사실 내가 김아중을 알아본 다음부터 이 꼴이 난 게 아닌가.


시시껄렁한 잡지 이름들을 아내보다 더 많이 알게 되고

세이브 더 칠드런이나 여성 영화제 등

김아중과 관련된 수많은 것들을 알게 모르게 눈여겨보게 되었으니

삶이 확 바뀐 거다.


그 숱한 배우 가운데

김아중이라는 이름 하나를 앎으로 해서 

많은 것들이 기억에 새겨지고 추억이 되어 간다.


... 뭐 ... 내겐 감사한 일이다.

이 대책 없는 블로그를 하게 된 것은 좀 그렇지만.


아무튼, 이 두서없는 글을 어떻게든 마무리를 지어야겠는데

생각나는 건 없고...


그냥 목련이나 라일락 나무를 알아볼 수 있다면 좋겠다는 것,

나무 이름을 척 알아맞히는 사람을 보면 왠지 부럽다는 것,

김아중은 목련인가 하는 뜬금없는 상상도 했다는 것...







(사진 출처: 영화 '캐치 미'(2013.12.18 개봉) 캡처)



2015년 6월 18일 목요일

김아중 그리고 우정



이성 간의 사랑은 지속 기간이 대략 1년 반에서 2년 반이라는 말이 있다.

사랑의 감정이란 결국엔 식는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런 것에도 과학적인 근거가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아마 그들이 말하는 이성 간의 사랑이란 

처음 만나 불꽃 튀기며 연애할 때의 감정을 말하는 걸 거다.

몇십 년을 같이 산 부부도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런 사랑은 연애 초기의 사랑과는 다르다.


팬도 연예인을 사랑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 역시 이성 간의 불같은 사랑은 아니다.

김아중 팬 중에는 사랑의 최장 지속 기한인 2년 반을 훌쩍 넘기고도 

팬을 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이해가 안 가... ...난... 유체이탈 중...


그러니까 2년 반이 넘어갔는데도 김아중이 여전히 좋다고 하면 

그건 과학적으로 연애의 감정이라고 할 수가 없는 거다.

그렇다고 파뿌리 밖에 남은 게 없는 부부의 사랑도 아니고.

슈퍼 변종 감정이라면 또 모를까...

과학적으로 사랑은 깨지는 거고, 깨지니까 사랑이고, 

안 깨지면 사랑이 아닌 거다.


그래서 이 뒤숭숭한 시기에

난 마치 아무런 걱정도 없는 사람처럼 

도대체 팬의 사랑은 무슨 사랑인가 하는

아무도 궁금하지 않을 사안에 대하여

딱히 쓸 곳 없는 머리를 굴려봤다.


...심심하니까...


다양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팬이라는 집단의 사랑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는 건 처음부터 내 능력 밖이고

또 그렇게 해야 할 이유도 없는데

아무리 할 일이 없더라도 나는 왜 이러고 있는 걸까? 

하는 회의도 잠시 내려놓고 

더운 날 웃통 벗고 생각을 거듭해본 결과...


...아내는 내가 웃통을 벗고 있어도 아무 관심이 없다...

...부부의 사랑...


뭐 역시 대단한 결론이 난 건 아니고

하늘 아래 새로운 게 없다더니

내 생각엔 친구 간의 사랑인 우정,

우정 출연한다는 그 우정이야말로 

대다수 팬의 감정을 비교적 그럴듯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아닐까 싶었다.


...알고 보니 이건 우정 블로그였어...


이성 간의 사랑은 쉽게 깨지기도 하고 유효 기간마저 있지만

인간성을 바탕으로 맺어지는 우정은 웬만해서는 변하지도 않고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지기도 한다.

우정 앞에 2년 3년이라는 기간은 껌도 아닌 거다.


그래서 오래도록 팬 생활을 지속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김아중에 대해, 비록 그것이 일방적인 감정일지라도,

우정 비슷한 것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난 여태 김아중하고 말도 해 본 적이 없는데 벌써 우정이라니...


한참 지난 얘기지만, 

우리의 구동백이 처음에 지수에게 뜬금없이 친구가 되고 싶다고 하는 이유도 

자신은 그저 팬일 뿐이라는 자각 때문이었을 거다.

좋아하지만... 팬이니까... 감히 연인이 되자고 하지는 못 하고...

이도 저도 아닌 그냥 우정 코스프레... 


동백은 순수한 듯 우정을 빙자해서 사랑을 쟁취했다.

애들처럼 친구나 하자는 감언이설로 

새로운 인간관계에 방어적이었던 지수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린 후 살살 다가간 결과다.

상대의 허를 찌르는 기발한 접근법이었다.

물론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하지만 그래서 나도 우정... 읭?...




(사진 출처: 영화 '캐치 미'(2013.12.18 개봉) 캡처)



2015년 6월 11일 목요일

김아중 그리고 동물원



극장에서 볼 외국 영화를 고르려면 귀찮을 때가 있다.

내용이 뭔지 배우는 누군지 평은 또 어떤지도 

알아야 하는 게 성가시게 느껴진다.


대단할 것 없는 그런 정보들 다음엔

또 아내의 취향이라는 절대 변수를 고려해야 한다.

나의 선택과 아내의 선택 사이에서

전혀 만만치 않은 저울질을 해야 할 때도 있다.


선택의 자유가 있다는 건

좋은 것이지만 귀찮은 면도 있다.


31가지 아이스크림 가게에 가면 매번 고민이다.

삐끗하면 예상치 못한 걸 손에 들고 저번 것이 좋았다느니 

아내 것이 더 낫다느니 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에 빠지게 된다.


기억이 가물거리기는 하지만 '라이프 오브 파이'에 보면

울타리 안에 갇혀 지내는 동물원의 동물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만큼 불행하지 않다는 내용이 있다.


자유롭지만, 다른 동물의 공격이나 굶주림의 위협이 있는 야생의 삶이

자유 대신 안전과 풍부한 먹이가 있는 동물원의 삶보다 

동물 입장에서는 더 나을 게 없다는 거다.

자유냐 배부름이냐...


동물들이 말이라도 해주면 속 시원하겠지만

그간 사람으로서의 내 경험에 비추어 보자면

난 작가의 말이 어쩐지 마냥 헛소리 같지만은 않다.


그러니까 자유롭지만, 영화를 고르느라 고민하는 삶이 좋은가?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뒹굴다가 때가 되면 김아중이 던져주는 영화나 덥석 무는 게 좋은가?

내용도 필요 없고 같잖은 평들도 필요 없고.

대나무만 먹는다는 동물원의 판다 같은 삶.


난 적어도 우리나라 영화에 관한 한 고민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김아중 영화에 갇혀있는 내 삶의 방식은 나무랄 게 없다.

판다 뺨치게 편하다...

나처럼 게으른 사람에게는 자유란 어떤 면에서는 성가신 거다.


말은 하지 않지만

아내도 이젠 김아중이 나오면 같이 보는 거고

안 나오면 자기 혼자 봐야 한다는 걸 안다.

아무도 고민하지 않는다.


김아중이 출연한 작품이 주식이라면

어쩌다 김아중이 SNS나 인터뷰를 통해 추천해주는 영화나 노래는 간식이다.


그런 건 이를테면 아내가 마트에서 자기 맘대로 골라 오는 

10개들이 아이스크림 꾸러미 같은 거다.

직접 고르는 번거로움 없이 편안하게 누워있다가 받아먹는 아이스크림.

전혀 나쁘지 않다.

맛이 없더라도 내 잘못은 아니다.


김아중이 추천하는 것들도

내 취향이 아닐 때는 

'아니 뭐 이런 걸...' 하면 그만이고


내 취향일 때는 

김아중과 나의 영적 합일점을 드디어 찾은 건 아닐까 하는,

비록 김아중은 합일점 따위를 원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다소 은혜로운 현재 진행형 망상 속으로 풍덩 빠져 볼 수도 있다.


그래서 결국 뒹구는 판다 같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동물원에 먹이가 뜸하다는...





(사진 출처: 영화 '캐치 미'(2013.12.18 개봉)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