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11일 금요일

김아중은 마침표

 


아내는 카레나 국을 한 솥 잘 끓입니다.

저를 놔두고 한가로이 외출하기 위한
포석이 아닐까 싶을 때도 있지만,

"이따가 김치라도 내놓고 먹어."

따위의 걱정 어린 말도 외출 전엔 
항상 잊지 않는 걸 보면
의심은 의심일 뿐이라고 고개를 젓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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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는 그런 면이 있어요.

무얼 어떻게 먹더라도 
최소한 같이해야 하는 반찬.
진수성찬이든 카레 한 가지든 
빠지면 안 되는 기본.


하지만 풍미가 강해서 다른 음식 
고유의 맛을 느끼기 어렵게 할 때도 많죠.

그래서 저는 되도록 식사 끝 무렵에
한두 번 김치를 먹는 거로 습관을 들였어요.

그러다 보니 이젠 아예 김치 없이도 밥을 잘 먹죠.

... 사실은 반찬 꺼내는 게 너무 귀찮 ...


그런데 피자나 햄버거만으로 속을 채운 날
왠지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분명히 배는 부른데 말이죠.

해외여행에서 몇 날이고 계속 현지 음식으로 
밥을 먹게 돼도 그럴 때가 있죠.
뭐랄까 식사에 마침표가 안 찍히는 기분이요.


그러면 김치를 먹습니다.

특히 해외여행 후 집에 와서 김치를 먹으면 
여행에서 먹은 모든 식사가 비로소 
마무리되는 듯한 느낌도 들고 
안도감마저 들기도 하죠.

'내가 김치 없는 여행을 무사히 해냈구나.' 하고.


그럴 때면 마라톤의 결승선이 달리기의 
마지막 지점이면서 목표 지점인 것처럼
어쩌면 저는 김치를 목표로 부지런히 밥을 
먹고 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그리고 어느 날 또 김치도 내놓지 않고 
혼자 카레 밥을 먹으며 
어디에도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다가  
어쩐지 김치와 김아중이 매우 닮았다는 
생각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김아중은 너무 강렬해서 등장하는 순간
영화 감상을 방해하는 것도 그렇고

그래서 그런 건 아니었지만, 
안 봐도 견딜 수 있게 심신을 단련한 ... 
건 아니어도 어쨌든 견디는 것도 그렇고요.


이젠 그럭저럭 잘 지내지거든요.
매일 김아중 안 봐도.
김치를 매일 안 먹듯.

김아중 없는 영화도 잘 보고.

마치 잊기라도 한 듯이.


그런데 그러다가도 
가슴 한편이 표현할 길 없이 
문득 허전하고 답답할 때가 있어요.

며칠 빵만 꾸역꾸역 먹은 것처럼.


아, 그럴 때 
내 맘대로 되는 건 아니지만 
김아중이 나와줘야 해요.

몇 년 만이든...


어머니께서 담그시던 얼음 띄운 동치미보다 
더 시원한 건 김아중밖에 없어요.

뭐랄까 그제까지 싱거운 영화와 
배우들을 보며 허송한 시간들에
속 개운한 마침표를 지긋이 찍을 수 있죠.

'이야, 이번엔 김아중 없이 oo 년을 버텼네.
내가 이걸 해냈어...'


김치 없는 해외 여행이 가능한 건
김치 한 보시기 정도는 집에 늘 있다는 
심리적 버팀목이 한몫하기 때문이죠.

김아중 없는 영화를 할 일도 없이 보는 건
그 끝에 김아중이 반드시 있을 걸 믿기 때문입니다.


영화들을 보고 있노라면 
김아중이 나올 거예요.
언젠가는.

결승선 없는 마라톤, 
김치 없는 집 냉장고는 없으니까요.


김아중이 나와야 
길었던 영화들이 끝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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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녀석들 영화 한 지가 벌써 ... ...



(사진 출처: 2017년 tvN 토, 일 드라마 '명불허전' 1회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