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고상한 불행에 대해 주워들었어요.
옛날 중국의 정이천이라는 사람은
어려서 과거에 급제하는 것,
부모 형제 덕으로 좋은 자리에 오르는 것,
재능이 있어 글을 잘 쓰는 것,
이 세 가지를 불행이라고 했답니다.
저런 불행이라면 나도 한 번쯤 겪어봐도 좋지 않을까,
겪어보지 않은 게 오히려 불행이 아닐까 싶은 불행들입니다.
수준이 달라요.
어쨌든 저런 일로 사람이 교만해지거나
나태해지는 것을 안쓰럽게 여기는 것이겠죠.
평소 어떤 게 불행이고 어떤 게 행복인지
굳이 생각하며 살진 않았어요.
그냥 어떤 상황에 놓이면 아, 좀 우울하네,
혹은 아, 이런 게 행복인가? 정돈데
저렇게 명확하게 선을 그어놓은 사람도 있었더군요.
난 그냥 아무 생각이 없...
행복을 정의하려는 사람은 많지만
불행을 정의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죠.
불행을 정의해놓으면 그 몇 가지를 제외한
다른 모든 경우는 행복처럼 보여서
행복의 종류가 더 많아진 듯한 효과가 있습니다.
당장 저 삼불행만 읽어봐도
해당 사항이 없는 저는 까닭 모를 안도감이 생기거든요.
'아, 난 억수로 운이 좋았네...'
일상에서 얻는 안도감.
뭐 그런 게 행복이죠.
삼불행의 의미를 다르게 해석하자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행복, 혹은 세속적 행복이
사실은 불행일 수 있다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옛 성현들은 행복이나 불행의 이면을 보라고 늘 강조했으니까요.
저는 그동안 김아중과 인사를 나눴다든지,
사진을 같이 찍은 팬들은 행복할 거로 생각해왔죠.
그런 걸 못 해봤기에 정말 부러웠어요.
그래서 불행하다고까지 할 수는 없었지만,
제 덕질이 참 찌질하게 느껴졌었죠.
하지만 이제 그런 찌질하다는 생각을 떨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겉으로 보이는 행복은 행복이 아닐 수 있으니까요.
김아중이 어깨를 쓰다듬어 준다든지
김아중과 악수를 해본다든지 하는 행위들은
제가 생각했던 것만큼의 행복은 아닐 수도 있는 겁니다.
아니, 어쩌면 오히려 그런 일은
불행이라고까지 할 수도 있는 거예요.
왜?
김아중과 친해졌다는 생각에 팬으로서 교만해질 수 있으니까요.
간절해야 할 덕질이 나태해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건 팬으로서나 인간으로서 불행한 일이고 경계해야 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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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무슨...
다 관두고
나도 교만에 절어봤으면...
(사진 캡처: 2019년 9월 11일 개봉 '나쁜 녀석들 : 더 무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