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27일 목요일

김아중 그리고 김밥



내게도 신념이라는 게 있었다.

라면은 꼭 김치랑 먹어야 한다든지,

김밥에는 단무지가 꼭 들어가야 한다든지 하는.


신념이 별건가...


그런데 살다 보니 언젠가부터 김치 없이 라면을 먹거나

단무지 없는 김밥을 먹어도 아무렇지 않다.


먹던 대로 먹지 않으면 땅이라도 꺼질 줄 알았는데

해보니까 별 게 아니다.

시간이 가면 사람도 변하고 허접스러운 신념도 변하는 거다.


나는 요즘도 김아중이 나오지 않는 우리나라 영화들은

저 영화 저러다 잘 되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에

예고편이나 기사만 봐도 불안하고 답답해진다.


도대체 이게 뭔 일인지...


그러다 보니 김밥에 단무지처럼

영화엔 김아중이 꼭 들어가야 한다는

신념 내지는 행동강령 비슷한 것이 그간 내게 있었다.


하지만 단무지 없이 김밥을 먹을 수 있듯이,

소금 없이 삶은 달걀도 먹을 수 있듯이


어쩌면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제 김아중 없는 영화를 볼 수 있을 만큼

아팠지만 성숙해져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하늘만 쳐다보고 있던 어느 날 슬그머니 떠올랐던 거다.


몸은 쉬었지만, 마음은 늘 유년기에...


그래서 몇 달 전 아내가 혼자 보고 왔다던 영화가

유튜브에 있기에 재생해봤는데


아, 이게 영... ...

김밥에 단무지 없는 거랑은 차원이 달라서

성숙은 개뿔이 되어버렸...


그래서 영화판으로의 화려한 비상을 꿈꾸며

작은 일탈을 도모했던 나는 얌전히 고개 숙인 채

제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는데

결국 나름대로 작은 결론을 내리게 됐다.


내가 비록 단무지 없는 김밥을 먹을 수는 있지만

김아중 없는 우리나라 영화는 아직 볼 수가 없는데


그건 김아중이 단무지가 아니라

영화가 바로 단무지이기 때문이며

신념의 문제가 아니라

김밥 없는 단무지만은 내가 늙어 꼬부라진다 해도 못 먹기 때문이라는...





(사진 출처: 영화 '캐치 미'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