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4일 수요일

나이


 
며칠 전엔 아내가 술이나 한 잔씩 하자고 했다.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가끔 심심하면 하는 일이다.
 
 
촛불을 참하게 하나 켜고 오붓하게 나란히 앉아
 
치즈를 곁들여 싸구려 와인이라도 마셨다면 그럴듯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언제나처럼 형광등 아래
 
주문한 치킨을 사이에 두고 청ㅎ를 한 병씩 따기로 했다.
 
 
내가 과연 한 병을 다 마실 수 있을까 하며 시작했는데
 
역시 사 분의 삼쯤 마시고 나니 배도 부르고
 
이젠 됐다는 느낌이 왔다.
 
 
TV를 보며 시시껄렁한 그 날 얘기를 조금 더 나누다가
 
씻으려고 화장실에 들어갔더니
 
얼굴이 벌겋게 된 초라한 중늙은이가 거울 속에 있었다.
 
 
아, 이 나이에 나는 어쩌자고 자꾸 블로그 질이냐
 
하는 한숨이 절로 나왔는데
 
그거야 김아중이 너무 예쁘니까 그런 게 아니냐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마치 정답이라도 되는 양 머릿속에서 한참을 맴돌았다.
 
아마 술김이어서 그랬을 거다.
 
 
거울 속에 중늙은이가 나타나기 시작한 이래로
 
나이를 인식하는 일은 괴로운 일이 되었지만
 
나이 먹는 게 좋은 일만은 아니라는 걸 처음 생생하게 느낀 건
 
아마 대학 2학년이 될 무렵이 아니었나 싶다.
 
 
모든 신선한 것들을 대표하는 것 같던 내 ㅇㅇ학번이라는 숫자가
 
신입생들에 의해 갑자기 그 빛을 잃는 것 같은 씁쓸한 느낌이었다.
 
 
억누르던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 같던 대학.
 
그 새로운 세상에서의 1년이 사라지고 있는 거였다.
 
 
그리고 난 그 첫해에 의미 있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뭐 결국 여자친구 하나 구하지 못했다는 찌질한 자각이었지만,
 
어지간히 초조하고 앞날에 비구름이라도 잔뜩 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이후엔 뚜렷이 언제라고 기억할 수는 없지만,
 
늘 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인식하면서 살았고
 
그게 즐겁지 않다는 느낌도 항상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어쩌다 보니 이젠 내 나이에 다소 무덤덤해지고 말았지만
 
그래도 문득 아이들의 나이가 떠오를 때나,
 
아내, 누나, 어머니의 나이를 계산해보거나,
 
 
그리고 관계도 없는 김아중 나이가 생각날 때면,
 
김아중은 자신이 이런 얼토당토않은 데 갑작스럽게 껴있는 사실이 몹시 언짢겠지만,
 
어쩔 수 없이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나이 들어가는 것을 상기하는 것은 결코 즐거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나보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 나이 드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한참 더 쓸쓸한 일이다.
 
 
연말이라서 이럴 거다.
 
지나온 세월은 어쩐지 허송한 것 같고 다가올 날은 불확실하게만 느껴진다.
 
거울 속 내 모습이 초라하지 않았던 것은 먼 기억 속의 일이다.
 
 
 
(사진 출처: KBS 2009년 4, 5, 6월 수목 드라마 '그저 바라보다가' 13회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