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7일 일요일
김아중 목소리는 세상 모든 음악을 바른다.
작년 여름쯤에 방을 정리하다가
둘째가 사용하던 MP3 기기 하나를 발견했었다.
노래도 듣고 동영상도 볼 수 있는 거라서
구매 당시에는 결코 싸다고 할 수는 없는 거였는데
스마트폰에 밀려 더는 사용하지 않게 되자
대충 지퍼락에 담겨 책장 한구석에 처박혀있었다.
사실 나는 그런 걸 사용할 일이 없었다.
이어폰의 음질은 아무래도 큰 스피커만 못한데다가
또 금세 머리를 아프게 해서 오래 들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 내가 듣는 음악이란 것이
소싯적 하드 록에서부터 클래식까지 변화를 거듭하더니
결국 김아중 노래에 이르러 그 변화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혹은 안식처를 찾게 되었다는 생각인데
이 좋은 걸 어디서나, 아무 때나 들을 수 없다는 건 늘 불만이었다.
집에 아무도 없을 때 들을 수는 있지만
아무도 없을 때라는 것이 예전 동네 약장수 오듯 자주 오는 것도 아니고
또 내가 아무리 할 일이 없다지만
아무도 없을 때마다 노래를 듣고 있을 수만은 없는 거라서
거의 항상 김아중 노래에 갈증 비슷한 걸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 MP3 기기를 발견했을 때
그것과 김아중 노래를 곧바로 연결하진 못했다.
그건 그저 내가 사용할 일이 없는, 철 지난,
머리를 피로하게 하는 기계에 불과했던 거다.
그러다 불현듯 거기에 김아중 노래와 동영상을 넣는다면?
그래서 시도 때도 없이 몰래 듣고 볼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이 떠올랐고
확인차 은근슬쩍 둘째에게 물어보니
자기는 그걸 다시는 사용할 일이 없으니 필요하면 사용하시라고,
그건 애초에 내 돈으로 사준 것인데도
마치 영원히 자기 것이었던 양, 인심을 쓰며 말해주었을 때
나는 참 둘째가 고맙고 미소가 저절로 나올 만큼 기특했다고밖에 할 수 없다.
그래도 그 기기를 당장 사용하기는 매우 막연했다.
우선 그걸 갖고 어디 다니면서 이어폰으로 들을만한 때와 장소가 없었다.
거리를 걸어 다니면서 들으면 좋겠지만 걸어 다닐 일이 흔치 않았고
집 안을 어슬렁거리면서 이어폰으로 들으면
평소 하지 않던 행동에 아내가 무슨 일인가 궁금해할 것이고
그러다 내 앞에서나 혹은 내가 없을 때
자기도 들어보겠다며 기기를 켜보기라도 하면
유사 이래 짝을 찾기 어려운 난감한 상황이 발생할 것이었다.
그래서 내게 MP3 기기는 매우 유용할 것 같으면서도 딱히
유용하지 않아서 볼 때마다 안타까워지는 무용지물이었는데
뜻이 있으면 이루어지는 것인지 마침 적당한 장소를 생각해내고야 말았다.
집 안에서 내가 유일하게 혼자 있을 수 있는 장소,
그래서 내가 이런 걸 사용하는지 마는지 아무도 모르고
관심도 없을 장소가 딱 한군데 있었으니
어쩐지 말 꺼내기도 남사스러운 화장실이었다.
이 글을 우연히 라도 읽고 있는 사람에겐 참 미안한 일이다.
내가 화장실에서 뭘 하는지 궁금해서
이 시답잖은 글을 읽기 시작하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어쨌든 일은 그렇게 된 거다.
늙은 아저씨의 은밀한 화장실 생활이 결코
궁금하진 않았겠지만, 당신은 얼떨결에 알아버리게 된 거다.
유쾌한 경험은 아니겠지만,
살다 보면 늘 엉뚱한 곳에 엉뚱한 복병이 있는 거다.
집 안에 혼자 있을 수 있는 장소가 한군데밖에 없다는 게
서글픈 일인지 아니면 그나마 다행인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있기는 있는 거였다.
물론 화장실에 혼자 있다고 해도 세상과의 소통은 늘 가능해야 한다.
가끔 아내가 문밖에서 강아지 밥은 준 것이냐, 상 차렸으니 빨리 나와라, 등
별 시시껄렁한 말을 내게 붙일 때가 있는데
이럴 때 못 듣고 재깍 대답을 안 하면 문을 빼꼼히 열고
재차 물어보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밖의 상황을 나 몰라라 할 정도로 볼륨을 크게 해놓고 들을 수는 없다.
그래도 어쨌든 요즘엔 화장실에 가는 일이 즐겁다.
전에도 괴로웠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낡아빠진 한국 문학 전집을
읽고 또 읽고 하는 것이 즐거운 일이라고는 할 수 없는 거다.
이젠 은밀하게 화장실에 음악이 흐르는 거다.
감미로운 목소리가 녹아 들어오는 거다.
내 귓속으로만...
세상 모든 음악 장르와 가수를 바르는 김아중의 목소리가.
(사진 출처: KBS 2009년 4, 5, 6월 수목 드라마 '그저 바라보다가' 12회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