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12일 화요일

김아중 때문에 블루레이를 찔러봤다.


어느 날 블루레이 플레이어(BDP)를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에 우연히 '미녀는 괴로워'가 블루레이로도 출시된 것을 알았을 때는

어렴풋이 '결국엔 블루레이인 것인가' 하면서도

한편으론 '뭐 필요하랴' 싶었는데




DVD와 BD는 화질 차이가 심각하다는 걸 알고 난 다음부터는

조금씩 내가 가진 '미녀는 괴로워'의 DVD가 같잖아 보이기 시작했고




'나의 PS 파트너'도 BD 판이 출시되는 게 아닐까 싶은 요즘에는

김아중은 최상의 해상도로 봐줘야 옳다는,

김아중은 마땅히 BD여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게 되었다.




그런데 내 개인적으로는 BDP를 사야 할 이유가 나름 절실하지만

우리 집 전체를 놓고 대충 보면 사야 할 이유라는 게 참 막연한데다가

특히 최종 의사 결정 기관인 아내 측 상황을 조금이라도 고려해보면

도무지 답이 안 나온다는 게 문제였다.




컴퓨터용 외장 BD 드라이브를 산다면 컴퓨터에 필요한 거라면서

얼렁뚱땅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알아본 바로는

컴퓨터용 드라이브는 TV에 연결하면 블루레이를 돌릴 수 없었다.




결국 컴퓨터 모니터가 웬 말이냐,

김아중은 역시 대형으로라는 갸륵한 초심을 지키자면

내가 가야 할 길은 아무래도 TV용 플레이어였는데




수년 전부터 영화는 전부 다운받아서 봤기 때문에

이름도 생소한 블루레이를 들먹이면

아내가 구매 자체에 거부 반응을 보일 것이 뻔했다.




거기에 오래전 홈시어터에 대한 나름의 환상이 사라진 뒤로

영화 관련해서 내가 사들인 것이라고는

김아중이 출연한 영화나 드라마 디스크밖에 없으니




내가 BDP를 산다는 것은 곧 김아중 영화를 TV로 보겠다는 말이 된다는 걸

어쩐지 아내가 쉽게 간파할 것 같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어쨌든 블루레이 플레이어를 우리 집에만 없는

현대 가정의 필수 가전제품으로 둔갑시킬 필요가 있었는데

내게는 그럴만한 논리적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고민은 계속되었지만,

고민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당연한 결론에 이르러

어느 날 운전하면서 갑자기 떠올랐다는 듯이 무작정 말을 꺼내봤었다.




"저기 블루레이라는 게 있데."

"그게 뭔데?"




나는

그게 DVD 같은 디스크인데 용량이 엄청 크다,

용량만 큰 줄 알았는데 이게 영화를 보면 화질이 또 엄청 좋다더라,

플레이어를 하나 사면 된다, 별로 비싸지도 않다는 말들을

생각나는 대로 쉴 새 없이 던져댔는데




아내는

"그럼 디스크는? 디스크를 사? 에이, 영화 디스크를 뭐하러 사.

그냥 다운받으면 되는데. 두 번 볼 필요가 뭐 있어."

라는 반응이었다.




다운받으면 된다는 아내의 말에서 이미 승패는 결정 난 셈이었지만

아쉬운 마음에 컴퓨터용 드라이브 스펙까지 계속 읊어봤다.




"아니 DVD는 시간이 지나면 화질이 열화라고 해서 망가진다네.

그런데 블루레이는 그렇지가 않데."

이때는 내가 BD와 M 디스크를 혼동해서 이런 말을 했는데 뭐 중요하진 않았다.

"그런데?"




"우리 왜 찍은 사진들 있잖아. 그런 걸 블루레이로 저장하면 좋은 거지.

용량도 커서 DVD 여러 장이 들어가고."


"에이 뭐하러 사. 우린 영화 디스크도 없잖아. ...

   당신, 김아중 영화 볼려고 그러냐? 미녀는 괴로워?"

"아니, 사진 같은 거 저장하면 좋다니까."




아니 그걸 어떻게 안 겨...?

순간 너무 뜨끔해서 더는 할 말을 잃고

어색함을 숨기기 위해 황망히 차선을 바꿔보기까지 했다.




나는 사진 저장에 온 힘을 주고 있었는데

아내는 왜 엉뚱한 곳에 힘을 주느냔 말이다...

사람 말을 듣는 겨 마는 겨...




김아중 때문에 블루레이를 찔러봤지만

김아중 때문에 못 먹는 감이 되어버린 슬픈 현실.

산다는 건 참...





(사진 출처: KBS 2009년 4, 5, 6월 수목 드라마 '그저 바라보다가' 12회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