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31일 일요일

김아중 그리고 삼불행




세 가지 고상한 불행에 대해 주워들었어요.


옛날 중국의 정이천이라는 사람은

어려서 과거에 급제하는 것,

부모 형제 덕으로 좋은 자리에 오르는 것,

재능이 있어 글을 잘 쓰는 것,

이 세 가지를 불행이라고 했답니다.


저런 불행이라면 나도 한 번쯤 겪어봐도 좋지 않을까,

겪어보지 않은 게 오히려 불행이 아닐까 싶은 불행들입니다.

수준이 달라요.


어쨌든 저런 일로 사람이 교만해지거나

나태해지는 것을 안쓰럽게 여기는 것이겠죠.


평소 어떤 게 불행이고 어떤 게 행복인지

굳이 생각하며 살진 않았어요.


그냥 어떤 상황에 놓이면 아, 좀 우울하네,

혹은 아, 이런 게 행복인가? 정돈데

저렇게 명확하게 선을 그어놓은 사람도 있었더군요.


난 그냥 아무 생각이 없...


행복을 정의하려는 사람은 많지만

불행을 정의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죠.


불행을 정의해놓으면 그 몇 가지를 제외한

다른 모든 경우는 행복처럼 보여서

행복의 종류가 더 많아진 듯한 효과가 있습니다.


당장 저 삼불행만 읽어봐도

해당 사항이 없는 저는 까닭 모를 안도감이 생기거든요.


'아, 난 억수로 운이 좋았네...'


일상에서 얻는 안도감.

뭐 그런 게 행복이죠.


삼불행의 의미를 다르게 해석하자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행복, 혹은 세속적 행복이

사실은 불행일 수 있다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옛 성현들은 행복이나 불행의 이면을 보라고 늘 강조했으니까요.


저는 그동안 김아중과 인사를 나눴다든지,

사진을 같이 찍은 팬들은 행복할 거로 생각해왔죠.

그런 걸 못 해봤기에 정말 부러웠어요.


그래서 불행하다고까지 할 수는 없었지만,

제 덕질이 참 찌질하게 느껴졌었죠.


하지만 이제 그런 찌질하다는 생각을 떨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겉으로 보이는 행복은 행복이 아닐 수 있으니까요.


김아중이 어깨를 쓰다듬어 준다든지

김아중과 악수를 해본다든지 하는 행위들은

제가 생각했던 것만큼의 행복은 아닐 수도 있는 겁니다.


아니, 어쩌면 오히려 그런 일은

불행이라고까지 할 수도 있는 거예요.

왜?


김아중과 친해졌다는 생각에 팬으로서 교만해질 수 있으니까요.

간절해야 할 덕질이 나태해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건 팬으로서나 인간으로서 불행한 일이고 경계해야 할 일...


.

.

.

은 무슨...



다 관두고

나도 교만에 절어봤으면...



(사진 캡처: 2019년 9월 11일 개봉 '나쁜 녀석들 : 더 무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