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22일 일요일
김아중 그리고 잊는 것도 축복
아무 생각 없이 TV를 켜놓고 밥 먹을 때가 있어요.
평소라면 싫어하는 프로그램이라도 멍하니 눈을 두게 되죠.
얼마 전에도 아내와 밥을 먹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그런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채널을 돌리며
어휴, 난 저런 건 진짜 못 보겠다고 하니까
당신은 참 까다롭다고 아내가 한마디 하더군요.
자기는 아무 말 없이 잘 본다며 말이죠.
사람이 모나고 까탈스러운지는 TV 프로그램 하나만
봐도 알 수 있는 거 아니겠느냐는 분위기였어요.
아울러 자신은 아무 TV 프로그램이나 잘 보는 너그러운
사람이라서 저처럼 까다로운 사람하고도 같이 산다는
매우 자기 만족스러운 암시를 풍기고 있었죠.
아무리 하나를 보면 열을 알고
가래떡 좋아하면 떡국도 좋아하는 거라지만,
TV 프로그램 하나로 사람의 성정을 판단한다는
발상은 참 유래없고 위험한 일인데 말입니다.
그렇지만 저런 소리를 들으면 왠지 무던한 건 무조건 좋은 덕목이고
까다롭다는 건 반드시 피해야 할 어떤 것 같은 느낌이 들잖아요.
사람이란 때에 따라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거고
무던한 게 항상 바람직한 건 아닐 텐데도 말이죠.
그리고 가끔 여기 블로그에서도 말하듯이
여배우 취향만 뺀다면 저 역시 누구 못잖게
세상 무던한 편이라고 믿고 있거든요.
그래서 프로그램 하나 때문에 저만 까다로운
인간으로 몰리는 건 좀 억울하단 생각이 들더란 겁니다.
하여간 그래서 제가
당신도 뭐라 하는 적 있다고 했더니
자기가 언제 그러느냐며 펄쩍 뛰지는 않았지만,
당치않은 소리라는 듯 도리질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말을 이어갈까 말까 한 3초 정도
번개처럼 계산해보다가 그냥 말해버렸어요.
당신도 내가 김아중 나오는 거 보면 뭐라 하잖어. 라고요.
어디서 그런 쓸데없는 용기가 났는지...
아 그랬더니 역시 펄쩍 뛰지는 않았지만
자기가 또 언제 그랬느냐며
영화도 같이 보러 가주는데 무슨 말이냐며
이런 배은망덕한 개소리는 세상 처음이라는 듯
이건 권위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라는 듯
배신감, 어이없음, 분함, 등 여러 감정이
순식간에 아내 얼굴을 스치는 거 같았죠.
좀 위험했어요.
그래서 한 번 더 강하게 '꿈틀' 해보려다가
에이, 당신도 그래~...
하고 얼버무리며 거실로 얼른 자리를 피하는 것으로
대화를 접어야 했습니다.
도망친 거로 오해할지도 모르지만, 이건
상대를 어리둥절케 하는 치고 빠지기 기법이죠.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성공할 순 없는.
제가 그런 일로 모양 빠지게 도망칠 사람도 아니고...
말발이 없지 가오가 없는 건 아니니까...
흐음...
하여간 좀 의외였어요.
제가 김아중 나오는 걸 볼 때마다
'또 김아중이야?' 하며 추임새처럼 딴지 걸던 일을
아내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말이죠.
물론 정말 잊어버린 건지 저한테 밀리기 싫어서
잊은 척한 건지까지는 제가 알 길이 없지만요.
어쨌든 아내의 말에 늘 촉각을 세울 수밖에 없는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냥 김아중도 아니고 '또 김아중'...
그 '또'가 문제...
김아중이 날마다 나오기라도 하나요?
어흑, 정말 못 기다리겠다. 싶을 때쯤,
유후~ 나 여깄지. 하며 몇 년에 한 번 나오는 걸 갖고...
아내는 가볍게 말하고 잊어버리는지 어쩌는지 몰라도
또 김아중이냐는 부류의 말은 매번 가슴에
날카롭게 꽂히는데 아내는 모르겠죠.
장난으로 던진 돌에도 머리를 다치지만
던진 사람은 대개 기억을 못 합니다.
아내는 짱돌을 던진 다음엔 잊는 거예요.
잊을 수 있는 것도 축복이라니까
아내 쪽에서 보자면 아주 편리한 축복입니다.
난 참 그렇다.
당신은 잊는지 몰라도 그건 좀 상처다.
머리 다친다. 다신 그러지 마시라.
라고 아내한테 말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
근데 말발이 달려...
그러다 영 김아중 못 볼 거 같고...
...
내가 김아중 팬이라는 걸 아내가 잊어준다면
정말 축복일 거라는 ...
(사진 출처: 2019년 9월 11일 개봉 '나쁜 녀석들 : 더 무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