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8일 화요일

김아중 그리고 내 모자






이런 블로그에 내 개인적인 얘기를 한다는 건 좀 그렇지만

그렇다고 개인적인 얘기를 할 수 있는 블로그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따지고 보면 여기 있는 모든 얘기가 내 개인적인 이야기이기도 해서

그래서 말을 꺼내 보자면 난 머리가 작은 편이 아니다.


아, 햇살이 이렇게도 좋은데 이 무슨 뜬금없는 고백인가...


수학 부등식 단원을 자면서 배웠더라도 다 알겠지만

무엇무엇보다 작지 않다는 뜻은

그게 무엇이든 그것보다 크거나 같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그 무엇이 무엇이든 난 큰 게 아니라

그 무엇과 같을 수도 있다는 여지를 남겨두고 싶다.


머릿속 내용물도 작은 편이 아니라면 바랄 게 없겠지만

그건 또 아니라는 주위 사람들의 의견이나 자각이

없다고는 할 수 없어서 아쉬움이라면 아쉬움이 좀 있다.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것 같던 여름이 더할 나위 없는 끝물에 이르렀지만

난 여름마다 은근히 모자에 신경이 쓰이는데 올여름도 예외는 아니었다.


모자 쓰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따금 뙤약볕에 강아지와 산책이라도 하게 되면

챙 넓은 둥근 모자를 쓴 사람이 부러워지기도 하고

머리도 채 감지 않은 아침나절에 어디라도 급히 나갈 일이 생기면

어울리는 모자 하나가 절실해지는데

나로 말하자면 내게 어울리는 올바른 사이즈를 일반 마트나

우리나라 인터넷에서 발견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원 사이즈 핏츠 올' 혹은 '프리 사이즈' 따위의

시답지 않은 설명을 붙이고 있는 모자들은

백이면 백 모두 나를 제외한 다른 모든 이를 위한 것이다.


그런 설명에 솔깃해서, 또는 머리가 짧을 때 억지로라도 맞는 듯해서 샀던 것들은

한 번의 세탁 과정을 거치면 머리에 쓰는 것이 아니라

머리 위에 얌전히 얹게 되는 사이즈로 변신하게 된다.


허접스러운 티셔츠 하나에도 대중소 세 가지 구분이 있는 마당에

어째서 모자 만큼은 하나같이 한 사이즈밖에 없는지 정말 궁금한 일이다.

예전 학창 시절엔 교모에도 사이즈 구분이 있어서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교모가 폐지된 이후에는 머리 큰 사람들도 덩달아 우리나라에서 폐지된 것인지,

모자 만드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다 수년 전에 우연히 미국이나 영국 가게에서는

XL을 넘어 XXL 사이즈까지 인터넷으로 판매한다는 걸 발견했는데

그건 마치 세상의 눈을 피해 어디에선가 숨어지내던 나의 동족들이

일시에 대밍아웃이라도 하는 듯한 숨 가쁜 감동이었고

누가 내게 이제 당신은 이 세상에 더는 혼자가 아니라며

등을 토닥여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모자라는 게 그다지 절실한 물건은 아니었고 또

그런 것까지 외국으로부터 사기는 좀 뭣하다는 생각에 그냥 부러워하고 말았는데

작년 겨울 미국에 머물 때 마침 생각이 나서

인터넷으로 겨울용 XL 사이즈 하나를 주문했었다.


예전에 L 사이즈 머리까지 문제없다던 모자를 한 번 구매했다가

그들의 L과 나의 L 사이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심연이 놓여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가슴이 아팠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무조건 XL이었다.


내 소중한 개인 정보를 블로그에 까발리다니...


하여간 당시에 며칠을 기다려 XL 사이즈 모자를 받아들고

두근대는 마음으로 머리를 넣어보는데

아무런 저항도 없이 머리가 모자 안으로 쑥 들어가는 것이

드디어 내 자리를 찾았다는 일종의 안도감과

학창 시절 이래 처음 느껴보는 편안함,

'모자를 찾아서'라는 길고 외로운 여정에 드디어 마침표를 찍었다는 성취감 같은 것들이

복잡 미묘하게 뒤섞여 마치 신세계라도 열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었다.


더구나 그 모자는 넉넉했다는 사실.

그랬다. XL은 내게도 넉넉했던 거다.

내가 늘 마음속으로만 웅얼거리던 작은 외침.

'난 그저 작지 않을 뿐이야!'를 확인했다는 것도 의의라면 의의였다.


이제 낮이고 밤이고 어디든 머리 안 감고도 편안히 떠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긋한 기분.

이젠 내 머리를 구속하며 옥죄던 모자들은 가라...


무슨 모자 하나 사고 호들갑이냐 할지 모르지만,

옷이나 신발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 판매하는 모자들은

스타일이나 사이즈가 다양하지 않아서

내 맘에 드는 것을 과연 살 수 있을지 그간 의문이 들었었기 때문에

모자를 찾았을 때의 기분은 남달랐다고 할 수밖에 없다.

머리 작은 것들은 모른다...

니들이 뭘 아러... 니들이 모자를 아러?...


하지만 적어도 모자는 누군가 어딘가에서 만들기는 만들 거라는 희망은 있었다.

결국, 사람이 사람을 위해 만드는 거니까 말이다.

나보다 훨씬 심한 사람도 어딘가엔 자신의 모자가 있을 거라는

믿음까지 버릴 필요가 없는 거다.


그런데 배우는 다르다.

내 맘에 딱 드는 배우.

그런 게 세상에 존재할 거라고는 아무도 기대할 수 없다.

김아중을 보기 전까진 나도 그런 게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했으니까.

하늘이 돕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다른 배우들은 모두 그저 어딘가 맞지 않는 모자들처럼

잠시 머리 위에 얹어졌다가 어딘가로 잊혀가곤 했다.


김아중은 내게 꼭 맞는 모자 같은 배우다.

잘 맞아서 편안하고 바람 불어도 날아갈 것 같지 않고

머리 대신 마음을 덮어주는 모자.

모자든 배우든 마음에 드는 것이 세상에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어쨌든 이번 여름에는 아마존에서 둥근 챙이 달린 여름 모자 하나를 샀다.

이제 내 사이즈를 아니까 실패하지 않는다.

자주 사용하지는 않더라도 맞는 모자가 여름과 겨울용으로 각각 하나씩 있는 거다.

마음은 김아중 하나로 사시사철 덮을 수 있지만

머리를 덮는 데는 대충 두 개는 필요한 듯싶다.


아내도 내가 잘 맞는 모자를 찾았다니까 자기 일처럼 좋아했었다.

그간 모자를 찾아 헤매던 나의 수고를 알기 때문이었다.

김아중을 찾았다고 했을 때는 말도 못하게 뜨악한 표정이더니...

그거 참...



(사진 출처: 영화 '캐치 미'(2013.12.18 개봉)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