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블루레이 플레이어를 사보려고
아내에게 넌지시 잽을 날려보다가 불의의 선방을 얻어맞고 나뒹군 이후
절치부심, 다시 일어설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
... 이렇게 쓰면 되게 옹졸해 보이는데...
하지만,
블루레이는 남편이 보려는 어떤 디스크,
남편이라는 작자가 보는 디스크는 김아중 영화라는
나로서는 짐작도 못 한 삼단논법 비슷한 아내의 사고 체계에
내가 딴죽이라도 걸어보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는 참에 오디오 CD 플레이어가 마침내 시원찮게 돼버렸다.
열에 여덟아홉 번 정도는 음반을 잘 읽지 못하게 된 거였는데
가끔 시원찮은 음악이나 듣는 나로서는
딱 잘라 완전히 고장 났다고 하기도 좀 뭐하고
그렇다고 고장이 아니라고 하기도 좀 뭐한 어정쩡한 상태였지만
나는 하늘이 무너져도 BDP가 필요한 사람이었고
캐치미'의 블루레이까지 따끈따끈하게 나온 마당이라서
BDP의 구매를 도저히 더는 미룰 수 없는 한계 지점에 와있었다.
그래서 구 CD 플레이어의 종말과 새 플레이어의 구매를
아내에게 당당하게... 는 아니고
비교적 작은 목소리로 우물우물 통보한 후,
목소리와는 달리 내 의지는 확고하다는 점을 어필해보기 위해서
반드시 고장 났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대의를 위해선 반드시 고장이었어야만 하는
CDP는 얼른 문밖으로 내놓았었다.
어렴풋이 짐작하기는 했지만
아내는 CD 플레이어의 구매엔 의외로 아무런 반대가 없었다.
음악은 당신 취미이니 CD 플레이어를 구워삶든 말든
당신 거 당신이 알아서 당신 비자금으로 사라는 식이었다.
그래서 나는 오디오 CD 전문 플레이어 대신
보급형 블루레이 플레이어를 떳떳하게 하나 질렀다.
물론 아내에게는 그저 CD 플레이어를 하나 산다고만 했다.
사실 요즘엔 오디오 CD 전문 플레이어는 웬만한 BDP보다 비싸니까
나처럼 대충 음악을 듣는 사람에게는
이것저것 다 돌아가는 BDP를 사는 것이 차라리 더 현명한 소비인 셈인데
현명한 소비라는 내 두리뭉실한 현실적 논리가
블루레이는 김아중이라는 아내의 뜬금없이 날카로운 논리를 만나면
무슨 험한 꼴을 당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정직과 기만이라는 선택의 기로에서
난 안전하고 얌전한 길을 택하기로 했던 거다.
뭐 어쨌든 난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많이 남지 않은 내 양심을 거짓말로 속이면서까지
플레이어를 사고 싶지는 않았던 거다.
난 오디오 CD를 재생할 수 있는 기계를 하나 샀고
그게 덤으로 블루레이까지 재생할 수 있을 뿐인 거다.
하여간 며칠 전 BDP가 무사히 집으로 배달되었다.
물론 아내는 내가 들인 기계의 잠재적 기능을 알지 못한다.
앞으로도 계속 알 필요가 없고 알아서도 곤란하다.
... 가끔은 모르는 게 정말 약이다...
그리고 문밖에 내놨던 CD 플레이어는 조용히 다시 들여다 놓았다.
소임을 다했으니 다시 거둬주는 것이 도리다.
기계도 오래 쓰니까 정이 붙어서 어쩐지 문밖에 있는 놈이
안쓰럽더라고 아내가 혹시라도 관심을 보이면 말할 참이다.
통하겠지...
(사진 출처: 인터넷 여기저기. 제50회 백상예술대상 레드카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