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28일 토요일

김아중, 나의 신화적 기준



그리스 로마 신화에 프로크루스테스라는 강도 얘기가 있다.

지나가는 나그네들을 잡아서 자기 침대에 뉘어보고

침대보다 크면 다리를 잘라내고 작으면 늘려서 사람을 죽였다는

누구나 다 아는 얘기 말이다.
 
 
그냥 그런 흉악한 얘기인가 했는데
 
이로부터 자기 기준에 맞춰 남의 생각을 억지로 고치려는 아집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비유하게 되었단다.
 
 
융통성 없는 아집의 위험성을 생각한다면
 
생각의 틀을 강도의 침대에 비유한 것은 참 적절하다는 생각이고
 
아주 지독한 아집은 아니라도 너나없이 모두
 
이런 침대 비슷한 거 하나쯤은 가슴속에 품고 다닌다는 생각도 든다.
 
 
살아오면서 이런 기준이나 틀 때문에 남에게 크고 작은 상처를 입히고
 
아마 나도 남에게서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을 것인데
 
생각해보면 내게는 이런 마음속의 틀이 하나가 아니다.
 
 
사회에서 타인에게 적용하는 틀과
 
가정에서 사용하는 틀이 미세하게 다르며
 
뉴스 정치판을 바라볼 때, 사회면을 들여다볼 때,
 
연예계를 볼 때 떠올리는 틀이 또 서로 다르다.
 
 
내가 정치인을 바라보는 기준이
 
아내를 바라보는 기준과 같을 수는 없는 거다.
 
아내는 내 용돈에 좀 더 관대해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런 틀들은 주위 환경과 교육, 그리고 각 개인의
 
유전적 특질에 의해 그 적용 범위나 유연성이 결정될 텐데
 
최근에 내 사고의 틀을 조금이라도 말랑해지도록 영향을 준 사람이 있다면
 
그건 또 어쨌거나 김아중이라는 생각이 확연히 든다.
 
 
김아중의 팬이 되기 전까지 내가 연예계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알 필요도 없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지만,
 
그저 딴따라라는 말의 통속성이 나타내는 저속함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다가 팬 노릇을 하면서
 
옳건 그르건 간에 예전과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비단 연예계에 대한 생각뿐만 아니라
 
내가 갖고 있던 갖가지 독선과 선입견들에 대해 반성을 하게 된 거다.
 
 
그러니까 연예계를 바라보는 사고의 틀이 바뀌면서 그를 계기로
 
나를 둘러싼 사회를 바라보는 사고의 틀도 전반적으로 너그러워지고 유연해졌는데 
 
 
이에 이바지한 인물이 알고 보니 김아중이었다는,
 
그래서 여러 번 하는 말이지만 김아중이 고맙다는,
 
결국 어쩔 수 없이 김아중은 여러모로 예쁘다는 얘기다.
 
 
그런데 사실 김아중이 내 사고의 침대를 말랑하게 한 것은 틀림없지만
 
김아중은 내게 새로운 사고의 틀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내가 어떤 연예인을 보고 예쁜지 아닌지 또는
 
언젠가도 말한 것처럼 얘가 싸가지가 있느냐 없느냐를
 
나름대로 추정하고 판단하려 할 때
 
나는 어김없이 김아중을 기준으로 하게 되는데
 
 
어떤 연예인이든 내 마음속의 침대에 눕혀놓고,
 
응? 이래도 되는 건가?,
 
넘치면 잘라내고 모자라면 늘리는 식의 잔혹한 판단을 해버리는 바람에
 
남아나는 연예인이 없게 되어버렸다.
 
 
이건 다양한 연예인을 마땅히 너그럽게 수용해서 TV라도 즐기며
 
변변치 않은 삶을 꾸려 나가야 할 나 같은 평범한 아저씨에게는 옳지 않다는 점에서
 
당사자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내 눈에 띈 가련한 연예인에게나
 
또 명백히 나 자신에게나 매우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침대의 길이를 몰래 조절할 수 있었기 때문에,
 
혹은 길고 짧은 두 개의 침대가 있었기 때문에
 
그 침대에 딱 맞는 사람은 처음부터 있을 수 없었다던가?
 
침대는 그저 구실일 뿐이었던 거다.
 
 
그러면 나는?
 
내 마음속의 프로크루스테스 침대, 김아중.
 

내 기준에 딱 들어맞는 연예인은 역시 세상 어디에도 없다.
 
김아중 외에는.
 
 
 
 (사진 출처: KBS 2009년 4, 5, 6월 수목 드라마 '그저 바라보다가' 13회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