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11일 화요일
김아중 일코를 해제했다.
'해피투게더'(이하 '해투')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나의 PS 파트너'가 개봉하는 날이었는데도 폭설 때문에 볼 수가 없었던데다
서울에서는 김아중이 팬들과 같이 단체 관람도 하는 상황에서
'해투'도 못 본다면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거고
팬으로서도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원래 계획은 나중에 다운이나 받아서
아무도 없을 때 조용히 감상하는 거였는데
어차피 '나의 PS 파트너'를 아내와 같이 보면
그동안의 내 코스프레를 아내가 다 짐작하고도 남을 마당에
굳이 마지막 순간까지 본색을 숨겨야 할 이유를 스스로 찾기도 어려웠다.
악당도 원래 마지막 순간에는 인심 쓰며 다 털어놓는 거니까...
그래서 '싸인' 이후 근 1년 넘게 세심하게 일구어낸 나의 소중한 일코를
스스로 물거품으로 만든다는 사실은 못내 아쉽고 까닭 없이 두려웠지만
'해투'를 그냥 제시간에 보는 것으로
목요일 밤 8시쯤에 이르러 마음을 잡았는데
자폭을 결심하기까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음은 물론이다.
마침 '해투'가 시작할 때 아내는 부엌에서 무언가로 분주했기 때문에
천우신조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적어도 거실 TV의 리모컨을 내가 선점하게 됨으로써
잠시나마 채널 선택권이 내게로 귀속되었다고 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아내가 다른 프로를 먼저 보고 있는데
내가 중간에 채널을 바꿔 '해투'를 보자고 하는 것 같은,
감히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최악의 무리수는 피할 수 있게 된 거다.
여름날 계곡에 먼저 자리 깐 사람이 임자 없는 물웅덩이 주인 행세하듯
TV도 먼저 앉아 먼저 보고 있으면 장땡인 거다.
그렇게 앉아 '해투'의 개그맨들 때문인지 혹은 김아중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혼자 실실 웃음을 흘리고 있었는데
부엌에 있던 아내가 얼마 후에 다가오더니 재밌느냐고 물어봤다.
'아, 뭐 그냥.'
초긴장 상태에 빠지게 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거의 없었는데
누워있던 강아지를 껴안고 뽀뽀를 하느라 TV는 건성으로 쳐다보던 아내가
부지불식간에 내 머리에 쿡하고 알밤을 먹이며 그랬다.
'아이고 왜 보나 했다. 그러면 그렇지.'
'주책이야 하여간... 나이는...ㅎㅎ'
아내는 다행히 묵인한다는 것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미소를 머금고
쓱 일어나 부엌으로 가더니 언제나처럼 미드를 봤다.
아 올 것이 왔다 갔구나 하는 후련함도 있었지만
어쩐지 후회도 밀려왔다.
그러면 그렇지 라니...
그간 당신 일코에 설마 하면서도 거의 속을 뻔했는데
당신 같은 김아중빠가 어디 가겠느냐는 뜻이 아닌가 말이다.
거의 먹혀들어간 일코를 조급하게 내 발로 차버린 건 아닌가 하는 후회와
아내에게는 역시나 하는 확신을 또다시 심어주고 말았다는 낭패감 등이 겹쳐
내 앞에 놓인 생이 약간 막막해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아내는 꽤 긴 시간 동안 부엌에서 얌전히 미드를 보며
나를 이해해줄 수도 있다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했는데
'해투'가 끝날 무렵,
전기장판과 김아중이 전달하는 따스함에 몸과 마음이 녹아내리던,
하지만 부엌의 움직임에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던 내게 다시 다가와
우연이었는지 아니면 의도적이었는지 나와 TV 화면 사이를 떡하니
가로막고 앉아 강아지 양치를 시켜주며 말했다.
'보니까 좋으냐? 아이구 그렇게 좋아?ㅎㅎ'
'ㅎㅎ'
아내는 웃었지만 내게 침묵은 금이었다.
일코가 해제된 상태에서 같이 웃는 것 외엔 할 말도 없었고.
그간 아내가 속아 넘어갔든, 속을 뻔했든, 아니면 속아주는 척을 했든
일코는 나 혼자 하고 나 혼자 만족하는 작은 비밀이었는데
이제 그만두게 되니 시원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
느른한 삶에 일코가 불러일으키는 긴장감이 나쁘지 않았는데 말이다.
'나의 PS 파트너'까지 보고 나면 일코 해제가 아니라 무장 해제 수준일 거다.
그때는 납작 엎드려 죽은 듯 지내는 게 상책일 텐데 그건 그때 가서 걱정할 일이다.
지금은
오랜만에 출사표를 던진 김아중에게
아무 걱정도 없이 아무 대책도 없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사진 출처: 2012년 12월 6일 KBS 2TV 해피투게더.
디시인사이드 김아중 갤러리 개념글 중에서, 금손 Vivien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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