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22일 토요일

김아중 그리고 아내 손바닥 안에서 구르기

 
지난여름엔 더워서 '원티드' 보는데 어려운 점이 많았습니다.
 
집이 너무 더운 거예요.
 
하지만 배 나온 아저씨는 거실 에어컨 접근 금지...
 
아저씨를 위한 나라는 없어...
 
 
그래서 방에 들어가서 작은 에어컨을 켜고 작은 TV, 작은 소리로 혼자 보고 있으면

뭔가 해서는 안 될 짓이라도 하는 듯한 죄책감 비슷한 게 드는 거였습니다.

나의 죄는 김아중을 보는 거...
 
 
그러다 보면 아내가 갑자기 방문을 벌컥 열며 들어와

가뜩이나 쫄아있는 나를 향해 혀를 차는 거죠.

"늙어서 주책 부리는데 뭐 있어."

야동이라도 보다가 걸리는 줄...
 
여보,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
 
 
'원티드'가 한창 막바지에 이른 무렵이었습니다.

모처럼 큰 애가 와서 같이 여름 휴가를 갔지요.

수요일 목요일이 끼어있었는데 아무래도 여행지에서 '원티드'를 보는 건 무리 같았습니다.

큰 애가 있어서 말이죠.

여행지에서 아버지란 사람이 갑자기 드라마 보겠다고

리모컨을 휘두르면 그림이 좀 이상하잖아요.

평소엔 TV가 볼 게 없다며 강아지 프로나 보던 인간이 말이에요.
 
 
근데 수요일 저녁에 숙소에서 다 씻고 빈둥거리는데

10시가 가까워지니까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아쉬움이 밀려오더라고요.

김아중이 막 어른거리면서 내가 안 본 걸 알면 막 서운해할 거 같고,

자기의 죄는 너무 이쁜 거라며 괜히 깽판도 칠 거 같고 막...
 
 
아, 그냥 술이나 한잔 해야겠다 하고 있는데 웬일로 아내가

"원티드 하는 날이지? 당신 그거 봐야지." 하며 챙겨주더라고요?


헐, 이게 웬 떡? 이러고 있는데

"그게 뭐예요?"라는 큰 애의 말이 이어지자마자

"아 김아중 나오는 드라마야. 그거 요새 아빠가 꼭 봐.ㅎㅎ."

라고 아내가 꼭 집어 얘기하더군요.

그냥 아빠가 요즘 보는 드라마라고 해도 될 것을 말이죠.
 
 
나는 그저 큰 애가 '아니 아직도? 아버진 대체 뭐지?'

하는 쓸데없는 의문을 가질까 봐 걱정입니다.
 
 
아들아, 난 이상한 사람이 아니야... 그냥 꼴에 이쁜 걸 아는 것뿐이지...

그게 틀린 건 아니잖아...? 뭐? 블로그? ... 그딴 건 모르지... ...
 
 
어쨌든 잠시 민망했지만 참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아내가 인정하는 공식 시청자로 등극했으니까요.

죽은 듯 안주나 먹으며 시간 맞춰 TV를 보면 되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수요일은 괜찮았습니다.

화기애애하게 드러누워 원티드를 다 같이 봤지요.
 
 
나는 먹던 오징어 다리 하나를 빼 들고 가끔 화면을 가리키며

쟤는 누구고 쟤는 걔랑 무슨 사이고, 등등을 기세 좋게 설명해줬지요.

물론 먹던 오징어 다리로 김아중을 가리키는 그런 몰상식한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김아중은 꽃으로도 가리키면 안 돼...
 
 
내가 오래도록 기억해야만 할 것 같은 일은 그다음 날인 목요일에 일어났습니다.

시간이 되어 원티드를 켜놓았는데 아내가 고도리를 치자고 하더군요.

고도리도 오래 하면 힘드니까 딱 다섯 판만 하기로 했죠.
 
 
나야 뭐 아무래도 좋았어요.

눈으로는 김아중을 보고, 화투는 손으로 치면 되니까.

패가 좀 붙는다 싶으면 더 해도 되고,

피박을 쓰더라도 다섯 판만 버티면 되고.
 

김아중을 보며 가족과 함께 단란한 한 때를 보낸다...

바람직한 좋은 그림이었습니다.

돈을 따면 더 좋고...
 
 
두어 판쯤 치고 나서 패를 섞는데 큰 애가 몇 판 남았는지 확인하더군요.

파투난 판은 제외하고 다섯 판이라서 가끔 헷갈리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이러는 거예요.
 
 
"야, 셀 거 없어. 아빠는 김아중한테 이렇~게 목이 매어있어.ㅎㅎ.

그래서 저거 끝날 때까지 어차피 아무것도 못해.

화투는 쳐도 어차피 이렇~게, 이렇~~~게 목이 매어있거든.ㅎㅎ"
 
 
아내는 자신의 목을 두 손으로 잡아끄는 시늉을 하며 깔깔대더군요.

표현이 맘에 들었는지 아니면 고소했는지 아주 좋아 죽더라고요.

나한텐 날벼락이었지만, 너무 딱 들어맞는 말이라 나도 웃을 수밖에 없었죠.

반박 불가, 수습 불가...

하지만,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보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까지 많이 당했지만 이게 제일 셌어요.

너무 정확하고 적나라했지요.

나는 정말 태연하게 화투를 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말이죠.

아내에겐 다 보였나봐요.

이제까지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열심히 뛰었던 셈입니다.
 

그 다음엔 TV를 어떻게 봤는지, 화투는 또 어땠는지 통 기억이 안 나...

쇼크 후 단기 기억 상실...
 
 
여행에서 돌아와 언젠가 원티드가 결방하던 날엔

"아빠가 어쩐 일로 그걸 안 본다? 오늘 아중이 나오는 거 까먹었나 보다.ㅎㅎ."

아내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웃으며 큰 애한테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오늘 올림픽이라 안 한다고 했어.ㅎㅎ."라고 했더니

"아, ㅎㅎ. 나는 놈이 있다더니 다 알고 있었구만. 까먹은 줄 알았는데. 그럼 그렇지.ㅎㅎ."

하며 웃더군요.
 
 
그럼요.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죠.ㅎㅎ

아무리 아내 손바닥 안이라도 뛰어도 보고 날아도 보고

안 되면 다시 굴러도 보고 그러는 거죠.

그러다가 김아중 사인 한 장을 딱 얻으면 끝나는 건데... 그게 안 되네...
 
 
 
 
(사진 출처: SBS 수목 드라마 '원티드' (2016년 6월 22일 ~ 8월 18일) 홈페이지,
'원티드' 관련 인터넷 기사들, 킹 엔터테인먼트)